이중언어 환경에서의 난독증
언어 능력의 지연일까, 아니면 난독증일까?
국내 다문화 가정의 아동 수가 지속적으로 증가하면서, 학교와 가정에서 이중언어 환경에서 자라는 아이들을 자주 접하게 된다.
이중언어 아동은 두 개의 언어를 동시에 배우기 때문에 언어 노출과 학습 속도에 차이가 생길 수 있으며,
자연스럽게 말하거나 읽는 능력에서 일시적인 지연을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은 언어 지연이 단순한 환경적 요인인지,
혹은 인지적인 언어 처리 능력의 문제인지를 구분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
특히 학교에서 교사들은 “이 아이가 한국어가 서툴러서 글을 못 읽는 건지, 아니면 난독증이 있는 건지 모르겠다”는 고민을 자주 하게 된다.
이 글에서는 이중언어 환경에서 자라는 아동에게서 난독증이 어떻게 나타날 수 있으며,
단순한 언어 발달의 지연과는 어떤 점에서 구분될 수 있는지,
그리고 현장에서 어떤 진단 접근이 필요한지를 구체적으로 다룬다.
이중언어 환경이 난독증과 언어 발달에 미치는 영향
이중언어 아동은 한국어 외에 또 다른 언어(예: 베트남어, 중국어, 영어 등)를 가정 내 주요 언어로 사용하며 성장한다.
이 경우, 언어 노출의 총량이 두 언어로 분산되기 때문에
한 언어에서의 어휘 수, 문장 구조 습득 속도는 단일언어 아동보다 느릴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지적 능력이나 인지 문제 때문이 아니라, 언어 습득 환경의 특성에 따른 차이일 뿐이다.
문제는 학교에서 쓰이는 주요 언어인 ‘한국어’가 상대적으로 늦게 습득될 경우,
교사는 그 아동이 글을 잘 못 읽고, 문장을 이해하지 못하며, 받아쓰기에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보고
‘읽기 장애’ 즉 난독증을 의심하게 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 경우, 난독증이 아니라 단순히 노출 언어의 비율이 낮기 때문에 생기는 이해력 부족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중언어 아동의 읽기 문제를 난독증으로 판단하기 위해서는
그 아이가 양쪽 언어에서 모두 읽기에 어려움을 보이는지를 확인할 필요가 있다.
만약 모국어(예: 베트남어)에서도 글자 해독이나 음운 처리에 어려움이 있고,
한국어에서도 비슷한 양상의 어려움이 반복된다면
이는 난독증일 가능성을 높여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난독증 진단의 어려움과 오진 가능성
이중언어 아동에게 난독증 진단이 늦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언어 능력의 지연이 ‘환경적 문제’인지, ‘신경학적 학습장애’인지 판단하는 도구나 전문가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아이가 글자를 잘 못 읽더라도
“집에서 한국어를 많이 안 써서 그렇다”, “시간이 지나면 나아질 것”이라는 말로 넘어가곤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중언어 아동 중 일부가 난독증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언어 환경 탓으로만 오해받아 필요한 조기 지원을 놓치는 사례가 적지 않다.
반대로, 언어 노출이 부족한 아동을 난독증으로 성급하게 진단하고
불필요한 치료에 연결하는 경우도 존재한다.
이런 오진을 막기 위해선, 진단 시 다음과 같은 요소를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 모국어와 한국어 모두에서 음운 인식, 글자 해독, 받아쓰기 능력을 함께 평가
- 언어 능력 이외의 지적 기능(비언어적 지능, 시공간 능력 등)과의 비교
- 가정 내 언어 사용 환경에 대한 정밀한 인터뷰
- 교사 및 부모로부터의 관찰 보고 수집
이러한 정보가 함께 종합돼야 단순한 언어노출 부족과 난독증을 정확히 구분할 수 있다.
난독증 학생에 학교와 가정에서의 실제적인 접근 방안
이중언어 아동이 난독증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면,
학교는 다음과 같은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다.
첫째, 모국어로 된 책이나 자료를 함께 활용하면서
그 아이가 어느 언어에서도 동일한 읽기 어려움을 보이는지를 관찰해야 한다.
둘째, 받아쓰기나 독후활동보다 말로 설명하거나 그림으로 표현하는 과제를 병행함으로써,
문해력 외의 인지적 능력을 종합적으로 평가할 수 있도록 한다.
가정에서는 아이가 글을 못 읽는다고 해서
무조건 한국어 사용을 늘리거나, 모국어를 중단시키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
오히려 아이가 가장 편하게 느끼는 언어로 읽고 말하는 활동을 꾸준히 이어가며,
읽기의 자신감을 회복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줘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사와 부모 모두 “우리 아이가 지능이 낮아서 그런 것이 아니다”라는 전제를 분명히 인식해야 한다.
난독증은 뇌의 정보 처리 방식이 다를 뿐이며,
올바른 접근을 하면 충분히 학습성과를 낼 수 있는 신경학적 차이일 뿐이라는 이해가 필요하다.
언어 환경과 난독증, 학습장애를 구분하는 섬세한 시선이 필요하다
이중언어 아동에게 나타나는 읽기 어려움은 그 원인을 단정 짓기 어렵기 때문에,
부모와 교사 모두 좀 더 세심하고 통합적인 관찰과 평가가 필요하다.
언어 발달의 문제와 난독증은 때때로 겹쳐 보이지만,
그 구분을 정확히 짓지 않으면 지원 시기와 방법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점점 더 다양해지는 만큼,
이중언어 아동을 위한 교육 접근도 단순한 한국어 기준이 아닌
아이의 배경과 언어 구조를 모두 고려한 진단과 지원 시스템으로 확장되어야 할 시점이다.